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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심포니 No. 11: 텅빈 충만 2, 2021,
아사에 유화, 100 x 100 cm




김순남 작가평론
NEW SYMPHONY, ‘참我’를 향한 깨달음의 교향곡


안현정 (미술평론가, 예술철학박사)


매 순간 삶의 의미를 명상하며 되새김질해온 작가에게 작품이란 마음의 기운을 담는 거울이다. 질서와 자율의 이중변주 속에서 존재를 명상하는 구도자(True self)의 길을 걸어온 지 30여년, 작가 김순남의 삶은 동양과 서양을, 비움과 채움을 아우르는 명상의 시간이었다. 구조적 직선에서 곡선으로 흘러온 작품세계, 미국 뉴저지와 독일 부퍼탈에서의 보헤미안 같은 삶은 하룻밤 꿈처럼 아득해지고, 관조하듯 흘러온 삶의 여정은 다시 여기 그가 태어난 땅에서 NEW SYMPHONY를 꿈꾼다. 비로소 작가의 삶은 선과 색의 순수미감 속에서 되살아난다. 떠나고자 하나 머물게 되고 자유롭고자 하나 질서를 추구해온 김순남의 삶은 반세기를 거친 인생의 여정과 함께 작품 안에 불이(不二)의 미학을 머금게 된 것이다.

우주법계와 양자물리학의 교차, 不二의 심포니

닫히는가 하면 열리고 비슷한가 하면 다르다. 차이가 무한히 확장되는 원형의 에너지 파장은 다르면서도 동질적인 우주의 안과 밖에서 끊임없는 변증법을 만든다. 객관적인 진리도 인간의 눈에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 안에서 우리가 규정한 의미작용(significance)은 계획된 삶을 벗어나 해탈의 자유를 꿈꾼다. 눈에 보이는 세계를 붙잡고자 하는 욕심이 자아를 고립시킨다는 단순한 이치, 질서는 삶의 굴레 밖에서 관조했을 때 자유와 동의어가 된다는 사실, 범주와 규칙들에 대한 자성(自省)의 물음 속에서 작가는 진리를 찾아낸다. 이 모든 설명은 김순남 작가의 심포니 시리즈에 담긴 철학이다. 30여년에 걸친 김순남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심포니의 미감은 다악장 형식의 관현악이 다름 속에서 조화되듯, 정신과 우주의 하모니로 연결된다. 양자물리학의 거장 프레드 엘런 울프(Fred Alan Wolf, Ph.D.)에 따르면, “정신이 없으면 우주는 존재할 수 없고, 정신은 그것이 인식하는 대상을 실체로 만들어낸다.” 이 말은 인간의 마음에 측량할 수 없는 무한한 창조력이 깃들어져 있다는 뜻이다. 현실의 고통과 망각을 벗어나는 무심(無心; 텅 빈 마음)을 깨달았을 때 참된 자아와 만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만물은 유에서 살고 유는 무에서 산다(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는 불이(不二)의 관계성에 대해 설파한바 있다. 『화엄경』의 핵심사상인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다) 역시 우리에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 진정한 삶을 향한 작가의 질문은 최근작인 ‘NEW SYMPHONY’시리즈에서 극대화된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원의 파동,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작가의 이러한 질문이 유심(有心)이라면, 작품이 던지는 역동적인 에너지는 기화(氣化)되어 무심(無心)으로 이어진다. 다소 어려운 이야기 같지만 간단히 말해 우리는 김순남의 작품 앞에서 모든 짐을 내려놓는 무심의 상태와 만나게 된다는 뜻이다. 반복되는 생로병사의 윤회를 벗어나고자 수행한다는 작가의 시각적 형상 속에서 사유의 충만함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의식적이면서도 의식적이지 않는 행위,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를 일깨우는 파동의 힘, 면에서 선으로 직선에서 곡선으로 이어온 행위의 반복 속에서 죽음으로 탄생으로 또 다른 가능성으로 이어지는 우주의 진리가 발견되는 것이다. 실제 출가를 결심하기도 했던 작가는 구도자의 삶을 갈망하며 <심포니 No.15_부처님께 바침>이라는 작품을 선보였고, 반복적인 생으로부터의 탈출을 위해 나이프로 라인을 무수히 반복시켜 ‘점-선-색’으로 이어지는 묵언의 행위를 작품 안에 담기 시작했다. 시작과 끝이 돌고 도는 조화, 원인이 있고 결과가 생성되는 그 자체, 작품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명상수행을 통해 ‘진정한 자아’와 만나는 과정인 셈이다. 이렇듯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세계관은 나를 지우는 무아(無我)의 행위성을 통해 형(形)과 컴포지션으로 부터의 해탈을 보여준다. 호흡하듯이 편안하게 나오는 오늘의 작업들은 과거의 모든 과정이 응축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은 파장이자 역할이다. 그리는 과정은 수행이자 명상하는 과정이며, 구조적인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오직 선과 점과 행위로 표현한 세계,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만들어지는 무아의 작업은 진정한 나 자신과 만나는 과정이다.” - 작가 인터뷰 중에서

유리알 유희(Das Glasperlenspiel), 사색하는 보헤미안

앞서 우리는 김순남의 오늘을 만나기 위해 새로운 작업의 현재성에 주목했다. 그렇다면 작가는 무엇을 위해 떠났고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온 것일까? 김순남의 작업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세 가지를 꼽자면, 작가가 태어난 지리산 산청의 자연주의 미감(소요유: 逍遙遊)과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의 자발적 연금술, 예술과 정신의 행위적 일체를 추구한 칸딘스키의 추상미학일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삶과 죽음에 관한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작가는 국내 생활을 접고 뉴욕 인근 뉴저지에서 20여 년 간 교수‧작가‧아내로서의 새로운 삶을 살아낸다. 헤세의 유리알 유희가 깊이 있는 마음수련을 담았던 것처럼, 작가 역시 잘 지내온 고향으로부터의 벗어남, 더 이상 속하지도 맞지도 않는 생활로부터의 탈피, 최고의 행복과 빛나는 자의식의 순간과 단절해야 하는 삶 속에서도 ‘독립된 작가로서의 삶’은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자 하는 유희는 김순남에게 가장 고귀한 것, 그 어떤 고통 속에서도 평생을 던져야 하는 가치 있는 행위가 아니었을까. “꽃이 모두 시들듯이, 젊음이 나이에 굴복하듯이, 지혜도, 덕도, 인생의 모든 단계도 제철에 꽃피울 뿐, 영원하지 않네. 생의 부름을 받을 때마다 마음은 슬퍼하지 않고 용감하게 새로이 다른 인연으로 나아가도록 이별과 새 출발을 각오해야 하지. 그리고 모든 시작에는 이상한 힘이 깃들어 있어 우리를 지켜 주고 살아가도록 도와준다.” 유리알 유희의 언어처럼 김순남이 사회성 강한 구상미술보다 순수내면과 만나는 칸딘스키와 같은 추상을 선택한 것은 어쩌면 필연일지 모른다.

작가는 2006년 심포니시리즈에서 아크릴의 빨리 마르는 특성에 주목한 바 있다. 94년 무렵 유화로 그렸던 원형의 심포니는 해체되어 ‘뮤직 시리즈’가 되었고, 이러한 음과 시의 의미화 과정은 관현악의 지휘자와 같이 ‘예술을 위한 예술’로의 감동을 보여주기 위한 행위와 연관되었다. 김순남의 작품이 ‘유리알 유희’와 연계되는 것은 작가가 그리는 행위를 유희(플레이)로 보기 때문이다. 과거를 해체하면서 명상적인 콜라주가 나오기도 하고, 심포니의 해체된 작업들이 비집고 자리를 잡기도 한다. 이는 실크‧한지작업과의 연결 속에서 작고 큰 모뉴먼트의 큐브들과 조화를 이루는 작품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12개가 하나로 연결된 스퀘어로 만든 <헤르만헤세에게 바침 (Homage to Hermann Hesse)>에 주목해보자. 90년대 석사 졸업작품전의 대표작(대학원 논문과 전시의 타이틀 '유리알 유희’)은 조화롭고 우주적인 불이의 시각 속에서 해체되고 재구성되어 무심무종의 현상과 만나게 되었다. 이렇듯 컴포지션을 유희로 보는 시각은 미술도 음악처럼 오랜 시간이 흘러도 감동을 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실제로 작가의 작품에서 뮤직시리즈와 Mixed-Media시리즈, 심포니시리즈 등은 한 시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순환의 과정 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탄생한다. 어린 시절 보헤미안에 대한 동경들이 헤세의 지적 유희에 빠져들게 했듯이, 작가의 음악적 컴포지션은 100호가 넘는 작업 <생명률> 안에서도 읽을 수 있다. 판넬 위의 수많은 마티에르는 작가를 탄생시킨 지리산의 유기적 생명력을 머금은 동시에 심포니시리즈가 담은 무아의 사유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우리에겐 생경한 이름 김순남, 하지만 그는 이미 2005년 뉴욕타임즈가 주목한 5인의 아시안 여성 아티스트로, 2014년 뉴욕한국문화원과 알재단이 주최한 전시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명실상부한 작가로 이름을 올린바 있다. 세계적인 미술비평가 미도리 요시모토(Dr. Midori Yoshimoto, The New Jersey City University) 교수는 뉴욕타임즈가 주목한 전시 ‘Resonance: Five Asian Women Artists in New Jersey’의 비평문에서 작가의 영감을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와 폴 클레(Paul Klee)와 같이 음악, 시, 철학에 대한 은유”속에서 읽어야 함을 피력한 바 있다. 작가 김순남이 다시 우리에게 돌아온 이유는 고통어린 이 시대를 살아내야 할 우리 모두의 삶이 ‘유리알 유희’에 있음을 진정한 생(生)의 붓질로 기록하기 위함이 아닐까.

- 2020년 7월



김순남 작가평론
안현정 (미술평론가, 예술철학박사)
월간 [전시가이드] 2020년 7월 vol.170, pp. 16 -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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